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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oijhga 2024. 1. 27. 13:26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나희덕 시집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죽음의 나무 초월적 존재를 향한 호소와 간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생명력의 화려한 개화를 지향하는 에로스적 충동이 아니라 소멸과 쇠락을 향한 음울한 죽음충동을 표출하고 있다. 한 그루 나무로 설정된 화자는,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마른 가지의 이미지를 통해 더 이상 외계로 뻗어나가는 운동이 불가능해졌음을 토로한다. 그에게 다시금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는 입김이나 옷깃 같은 외부의 자극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는 잎사귀나 꽃을 피우는 대신 차라리 내부로의 유폐를 꿈꾼다.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퇴각한 채 무감각한 상태, 내적 세계에 봉인된 상태에 머물기를 희망한다. (...) 이렇게 불모성을 지향하는 의식은 역으로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강한 에로스적 친화와 생명력 넘치는 세계에 대한 욕망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그런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화자가 가진 무의식적인 불안을 시사한다. 즉 죽음충동에 매혹을 표명하는 화자의 반리비도적 입장은 에로스적 충동에 몸을 던지려는 욕망의 유령적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황홀하게 피어나고 싶고 나부끼고 싶은 화자의 욕망이 자기 처벌, 자기 단죄의 형태로 회귀했을 때 위 시의 엄숙하게 고양된 허무주의로 현상한다. 정작 “당신”의 입김이나 옷깃이 스쳤을 때 자신의 감춰둔 에로스적 열정이 어떻게 분출할지 몰라 화자는 두려워하고 있다. -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말」 남진우 ***** 그때 내가 당신에게 충동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이 시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당신을 충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용기도 무모함도 없었다. 실뿌리 하나까지 메마른 죽은 나무였다. 지금까지 내게 남은 것은 핑계다. 나는 아직까지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옹졸한 위안의 말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1989년 등단 이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 간명하고 절제된 형식으로 생명이 깃든 삶의 표정과 감각의 깊이에 집중해온 나희덕 시인이 [야생사과] 이후 5년 만에 펴낸 일곱번째 시집이다.

무한 허공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는 나무에서 저 무(無)의 바다 앞에 선 여인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이번 시집에는 죽음의 절망과 이별의 상처를 통과한 직후 물기가 마르고 담담해진 내면에 깃들기 시작하는 목소리와,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조용하고도 결연한 행보가 가득하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을 온몸으로 부딪쳐온 시인은 이제,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존재의 시원인 깊고 푸른 바다에서 시인이 만나는 무수한 말들과 그가 내보낸 한 마리 말, 이들의 상호순환적인 움직임은 해변에 이르러 부서지는 흰 포말처럼, 무의 허공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도약으로 볼 수 있다. 그 도약은 무언가, 아직 오지 않는 것처럼 어느 날 찾아드는 목소리일 사랑에의 희구, 궁극적으로 시인이 쓰고자 하는 한 편의 시를 향한다


시인의 말

1부
어떤 나무의 말 / 뿌리로부터 /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 풀의 신경계 /
휠체어와 춤을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 들리지 않는 노래 / 당신과 물고기 /
호모 루아 / 어둠이 아직 / 그날의 불가사리 / 밀랍의 경우 / 무언가 부족한 저녁

2부
취한 새들 / 그날 아침 / 피부의 깊이 / 불투명한 유리벽 / 다시, 다시는 /
묘비명달개비꽃 피어 / 상처 입은 혀 / 그들이 읽은 것은 / 마비된 나비 /
식물적인 죽음 / 겨우 존재하는 / 그곳과 이곳 / 흙과 소금

3부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 명랑한 파랑 / 아홉번째 파도 / 삼 분과 삼 분의 일 /
수레의 용도 / 여우와 함께 살기 / 그의 뒷모습 / 신을 찾으러 / 대장간에서의 대화 /
진흙의 사람 / 밤 열한 시의 치킨 샐러드 / 국경의 기울기 / 언덕이 요구 하는 것 / 등장인물들

4부
잉여의 시간 / 흑과 백 / 조롱의 문제 / 벽 속으로 / 아주 좁은 계단 / 방과 씨방 사이에서 /
추분 지나고 / 창문성 / 동작의 발견 / 눈 먼집 / 나를 열어 주세요 / 장미의 또 다른 입구 /
내 것이 나닌 그 땅위에 /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해설 -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말 / 남진우